칼럼 | 단일형 ERP의 종말···조립형 아키텍처가 기업 민첩성을 좌우한다
필자가 ERP 현대화 프로젝트를 이끌고 IT 및 비즈니스 임원들과 협력해 온 경험을 돌이켜보면, 성공을 결정짓는 요인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고방식과 아키텍처였다. 가트너는 “2027년까지 새롭게 구축된 ERP 프로젝트의 70% 이상이 초기 비즈니스 케이스 목표를 온전히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제 ERP 성공은 근본적으로 다른 아키텍처를 요구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ERP는 재무, 공급망, 제조, HR 등 기업 운영의 중심에 자리해 왔다. 통합과 통제를 약속했던 이 시스템은 지금 유연성을 억누르고 혁신 속도를 늦추며 기술 부채를 쌓는 구조로 변질되고 있다.
여러 ERP 프로그램을 지켜본 경험에 따르면 문제는 ERP 자체가 아니라 ERP를 대하는 우리의 관점에 있다. 많은 기업이 ERP를 단순한 기록 시스템으로 취급하며, 그 너머에 있는 더 큰 기회를 놓치고 있다.
다가올 비즈니스 민첩성의 시대는 ERP를 모듈형, 데이터 중심, 클라우드 네이티브, AI 기반의 조립형 플랫폼으로 재정의하는 기업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 필자가 함께해 온 여러 조직에서도 기술 리더들은 현대화 여부를 두고 논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업을 멈추지 않고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가 되고 있다.
포브스의 한 칼럼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두고 “전 세계 기업의 75%가 유연성과 확장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단일형 ERP를 모듈형 솔루션으로 대체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ERP가 레거시 단일 제품에서 적응형·혁신 중심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흐름을 수용한 기업은 ERP를 혁신의 촉매로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전환에 실패한 기업은 핵심 시스템이 가장 큰 병목으로 남은 채 뒤처질 위험을 안게 된다.
단일형에서 모듈형 백본으로의 전환
1990~2000년대 ERP는 단일 벤더, 단일 코드베이스, 그리고 기업 전 영역을 아우르는 초대형 구축 프로젝트를 의미했다. 기업들은 모든 프로세스의 세부적인 요구사항을 맞추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소프트웨어를 커스터마이징했다.
클라우드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음 장이 열렸다. SAP,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MS), 인포 등은 포트폴리오를 SaaS 중심으로 전환했고, 업종 특화 모듈형 ERP 플랫폼을 앞세운 스타트업들도 잇따라 등장했다. API와 서비스 개념이 확산되면서 비즈니스 변화에 맞춰 진화하는 ERP가 가능하다는 기대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필자가 참여한 한 전환 프로젝트에서는 ERP를 단일 구현체로 취급하던 관점을 내려놓은 순간 변화가 시작됐다. 기능을 모듈 단위로 분해해 비즈니스 팀이 직접 소유하고 독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구조를 재설계한 것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많은 기업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이제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다. 여전히 상당수 조직이 ERP를 성장하고 적응해야 하는 ‘살아 있는 플랫폼’이 아니라, 한번 설치하면 끝나는 ‘완료된 시스템’으로 바라보고 있다.
기존 사고방식이 초래하는 비용
레거시 ERP 관점으로는 오늘날 변화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그 결과 혁신은 늦어지고, 데이터는 파편화되며, IT 조직은 끊임없이 뒤처진 상태를 만회하느라 소모전을 반복하게 된다. 기업은 비즈니스 변화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아키텍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린IX는 가트너 분석을 인용해 “조립형 IT 접근법을 채택한 조직은 새로운 기능 구현 속도가 80% 빨라진다. 특히 가트너가 정의한 조립형 ERP 플랫폼을 적용할 때 이 효과가 두드러진다”라고 설명했다. 모듈형 ERP와 전통적인 단일형 ERP 사이의 뚜렷한 성능 격차를 보여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필자가 실제 프로젝트에서 확인한 레거시 ERP 사고방식의 비용은 다음과 같다.
• 유연성 부족: 비즈니스 모델은 소프트웨어 주기보다 빠르게 변하며, 전통적 ERP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 과도한 커스터마이징: 수년간 축적된 맞춤형 코드는 업그레이드를 위험하고 비용 높은 작업으로 만든다.
• 데이터 파편화: 여러 ERP 인스턴스와 분리된 모듈은 데이터 일관성을 깨고 분석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 사용자 불만: 노후화된 인터페이스는 우회 작업을 부르고 사용자 참여를 떨어뜨린다.
• 높은 TCO: 유지보수와 업그레이드에 예산이 잠식되면서 혁신 투자 여력이 사라진다.
조립형 ERP의 등장
새롭게 부상하는 조립형 ERP 모델은 이러한 단일형 구조를 해체한다. 가트너는 이를 “모듈형 구성 요소를 기반으로 API로 연결되고 데이터 패브릭으로 통합되는 아키텍처”라고 정의한다.
SAP에 인수된 아키텍처 관리 도구 기업 린IX(LeanIX)는 “모듈형·상호운용 구성요소로 구축된 조립형 ERP는 단일형 제품군에 의존하지 않고 필요한 기능을 조립하듯 구성해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정적인 ERP에서 동적이고 적응적인 비즈니스 플랫폼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맞춤 개발과 패키지형 ERP 양쪽을 경험한 필자로서는 조립형 접근의 진정한 힘이 단순한 ‘통합’이 아니라 ‘조립 속도’에 있다는 점을 확인해 왔다. ERP를 단일 제품군이 아니라 기업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재무, 공급망, 제조, HR 같은 핵심 프로세스는 기반으로 두고, AI 예측, 고객 분석, 지속가능성 추적 같은 모듈형 기능은 비즈니스 변화에 따라 동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이 접근 방식은 기업에 다음과 같은 이점을 제공한다.
• 서로 다른 벤더 또는 내부 개발팀의 모듈을 조합
• 불안정한 커스터마이징 대신 표준 API 기반의 클라우드 앱 통합
• 자동화·인사이트·예측 의사결정에 AI 활용
• 역할 기반(persona-based) 경험 제공
페르소나: 조립형 ERP가 드러내는 ‘사용자 중심’의 얼굴
전통적인 ERP는 모든 사용자를 동일하게 취급해 하나의 인터페이스에 수백 개 메뉴와 끝없는 입력 화면을 쌓아 올렸다. 조립형 ERP는 이를 뒤집어 각 역할이 실제로 수행해야 하는 업무를 중심으로 설계된 ‘페르소나 기반 디자인’을 적용한다.
• CFO는 AI 기반 시나리오 모델링을 통해 조직 전반의 재무 건전성을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 공급망 리더는 실시간 수요 신호, 공급업체 성과, 지속가능성 지표를 모니터링한다.
• 공장 관리자는 IoT 기반 설비 상황, 예지정비 정보, 생산 KPI를 추적한다.
• 영업 및 서비스 팀은 시스템을 이동할 필요 없이 운영 데이터를 끊김 없이 활용한다.
필자의 경험상 ERP가 범용 트랜잭션이 아니라 실제 사용자 페르소나 중심으로 설계될 때 도입 효과가 높아지고 의사결정 속도도 빨라졌다.
도전과 함정
이 문제들은 이론적 논의가 아니라 IT와 비즈니스 조직이 매일 마주하는 실제 과제들이다.
• 데이터 거버넌스: 통합된 데이터 전략이 없으면 모듈성은 곧 혼란으로 이어진다.
• 통합 복잡성: API는 버전 관리, 인증, 의미 체계 정렬 등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
• 벤더 종속: 개방형 플랫폼이라도 미묘한 의존성이 생길 수 있다.
• 변화 관리: 직원은 기존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익히기 위한 지원과 교육이 필요하다.
• 보안: 시스템 간 연결이 확대될수록 공격 표면도 넓어진다. 제로트러스트 전략은 필수다.
진정한 성공은 기술적 통찰과 조직에 대한 공감 능력을 균형 있게 갖춘 리더십에서 나온다.
CIO의 새로운 플레이북
수년간 ERP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비즈니스·IT 조직과 협업해 온 경험을 돌아보면, ERP 성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ERP를 끊임없이 진화하는 혁신 플랫폼이 아니라 ‘완성된 시스템’으로 믿는 고정관념이었다.
이 변화는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ERP가 비즈니스 안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을 재정의하는 문제다. 맥킨지는 “ERP 코어의 현대화는 단순한 기술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기업 전반의 새로운 역량을 가능하게 하는 비즈니스 변혁”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현대화를 이끄는 CIO라면 완전히 새로운 플레이북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 소프트웨어가 아닌 비즈니스 아키텍처에서 출발한다.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길 원하는지 정의한 뒤, 그 구조에 맞춰 ERP 역량을 설계한다.
- 통합 데이터 패브릭을 구축한다. 조립형 ERP의 성패는 일관되고 품질 높은 데이터에 달려 있다.
- 모듈형 사고를 점진적으로 적용한다. 소규모 파일럿으로 가치를 입증한 후 확장한다.
- 퓨전팀을 강화한다. IT·운영·비즈니스 전문가를 하나의 애자일 팀으로 묶어 빠르게 솔루션을 조합한다.
- 성공 기준을 ‘오픈일’이 아니라 결과로 측정한다. 목표는 단일 런치가 아니라 민첩성과 회복탄력성이다.
- 벤더에 개방성을 요구한다. 공개 API와 진정한 상호운용성을 확보하고, 독점적 클라우드 라벨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라클은 이러한 필요성을 강조하며 “기업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조립형 애플리케이션 포트폴리오로 이동해야 하며, 이는 재조립·확장이 가능한 구조여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ERP 선택 기준에서 유연성이 핵심 요소가 돼야 함을 의미한다.
ERP를 혁신 플랫폼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로우코드 워크플로우, 분석, AI 기반 보조 도구 등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문화를 장려해야 한다.
ERP가 ‘보이지 않게’ 되는 때
몇 년 후에는 ERP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CRM이 고객 경험 플랫폼으로 확장됐듯, ERP도 기업의 보이지 않는 디지털 백본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이다.
필자는 ERP가 온프레미스에서 클라우드, 그리고 AI 기반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가까운 미래에는 AI가 트랜잭션과 워크플로우를 백엔드에서 처리하고, 직원들은 대화형 인터페이스와 내장 분석 기능을 통해 결과만 요청하게 될 것이다. 시스템에 로그인하는 대신 원하는 업무 결과를 말하면, 조립형 ERP 패브릭이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단계를 동적으로 조율하는 방식이다.
이 미래는 지금 ERP를 재정의하는 기업이 차지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업그레이드 주기가 아니라 기업 운영 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과정이다.
기록 중심에서 가치 창출 중심으로
ERP는 한때 재고 관리, 마감 처리, 프로세스 통제 등 효율성 중심의 시스템이었다. 오늘날 ERP는 회복탄력성과 혁신을 견인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필자는 여러 ERP 프로그램을 경험하며, CIO의 진짜 과제는 단순히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운영 방식 자체에 ‘민첩성’을 구조적으로 설계하는 일이라는 점을 확인해 왔다.
클라우드·AI·사람 중심 설계를 기반으로 하는 조립형 ERP는 이러한 전환을 위한 청사진이다. ERP를 기록 시스템에서 혁신 시스템으로 바꾸며, 시장 변화 속도에 맞게 끊임없이 진화할 수 있도록 만든다.
기회는 분명하다. 지금 변화를 주도할 것인가, 아니면 어제의 아키텍처에 머무른 채 내일의 기업을 만들어가는 이들을 바라볼 것인가. 함께 생각해 볼 질문이다.
dl-ciokorea@foundryco.com
















